데이터 기반 연구의 클래식을 만나다

 발과 펜끝으로 기록한 한국사회, 1950-70s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 빈도표와 무허가주택 지도가 그려진 필드 노트. 데이터를 품어주었던 마그네틱 릴 테이프. KOSSDA는 오래된 아날로그 자료들을 디지털로 전환하여 장기적인 보관과 활용이 가능하도록 아카이빙 해 왔습니다. 디지털이 지배하기 전 그 시절 데이터 생태계의 감성과 추억을 소환합니다.

1. 관악캠퍼스 주변 무허가판자촌 서울 외곽 도시민 현지조사 기록, 1971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들어서기 이전 우리가 일상으로 거닐고 지나는 캠퍼스의 인근 지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이 확정되고 관악산 서북지역에서 기공식이 있던 해인 1971년 이 지역을 현지 조사하여 노트에 지도를 그리고 인터뷰 내용을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시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서울대학교 부지와 인근은 영등포구 관할이었고 1964년 전후 서울시가 무허가판자촌 정리 정책의 일환으로 도심지역 철거민을 이 지역으로 이주시키면서 무허가주택이 형성되었습니다. 1962년 허가 이주로 자리 잡은 영등포구 신림1동과 같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허가로 이 지역 주민들은 브로크 벽돌과 루핑 지붕, 판자, 천막, 움막 형태의 주택에 살았고 직업은 대부분이 노동자로 평균 15분 멀게는 30분 거리로 떨어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영등포와 서울역 등 서울 도심으로 일을 다니는 서울 외곽 도시민으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현지조사 기록의 재미는 통장, 반장, 복덕방주인, 목사 등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제보자를 인터뷰하여 정리한 구조화된 면접 내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당시 항공사진 지도와 견주어 봐도 손색이 없는 직접 두 발로 거닐며 관찰로 작성한 지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경기도 6개 마을 시계열 조사 기록 시민 한국 농촌의 사회구조 연구, 1958~1980

이 조사는 “농촌분야에 대한 최초의 조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이만갑, 1973). 이만갑 교수는 농지개혁으로 농민의 약 3분의 2가 자작농이 되었음에도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 주목하고 과학적 사회조사방법을 도입하여 실증적인 농촌 연구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1958년 경기도 광주군과 용인군 소재 6개 마을(현재의 성남 남쪽 지역과 모란시장 동쪽 부근, 분당 동남 지역)을 선정하고 1958년, 1969년, 1980년 약 10년 간격으로 한국 농촌사회의 변화를 추적 조사한 이 연구는 시계열 현지조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동일 문항의 조사표를 가지고 현지조사를 실시하여 약 30년간의 농촌사회의 변화를 기록한 이 연구는 “한국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급격한 변동기를 관찰한 것(이만갑, 1984)”으로 새마을운동의 영향, 공업화와 도시화로의 변동을 추적해서 살펴볼 수 있는 사례를 제공합니다.  

전시는 문헌조사부터 시작하여 지역통계조사, 마을지도 작성, 마을 반별 가구주 조사, 파일럿 스터디 보고 개요, 조사표와 통계표, 본조사 기록으로 이어집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던 시절 손으로 적어 작성한 현지 조사 기록물을 통해 아날로그 감성에 더하여 디지털세대인 우리가 나아간 것 혹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출처: 이만갑. (1973). 한국 농촌사회의 구조와 변화. 서울대학교출판부.

         이만갑. (1984). 공업발전과 한국 농촌. 서울대학교출판부.


3. 1960-70년대 출산률 조사 혼합 연구 한국 중간도시 이천읍사례, 1965·1974

한국의 인구정책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습니다. 정부는 1962년부터 70년대까지 산아제한을 목표로 가족계획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가족계획정책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이 정책의 효과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서울대학교 인구 및 발전문제연구소(현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는 한국 이천읍에서 1965년과 1974년 약 10년의 시차를 두고 차별출산률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또 이들 중 인구학적, 사회경제적 특성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하여 인터뷰를 수행하였습니다. 가족과 결혼, 출산과 부부관계 등에 대한 설문조사 응답과 함께 연구자가 노트에 빼곡하게 적은 인터뷰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시 이촌읍 거주 기혼여성의 짧은 생애사를 엿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번 전시에서는 KOSSDA 구축 자료에는 포함되지 않은 연구보조원의 현지조사 노트를 공개합니다. 필드노트에는 이제는 널리 알려진 학자이지만 당시에는 연구보조원이었던 서울대 학생들의 조사 계획과 일정, 연구 관련 강연과 세미나 메모 등의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이 조사는 체계적인 연구계획하에 완성도있게 수행되었지만, 당시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그 가치를 충분히 발현하지 못했습니다. 권태환 교수의 회고처럼 “사회통계의 미발달과 자료처리 분석도구의 심각한 결핍”으로 인해 대부분의 분석이 단순한 빈도표 작성에 그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구문제가 화두인 지금, 당면한 연구질문과 발전된 현대의 분석 도구로 이 자료를 다시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 변동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와 통찰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출처: 권태환. (2006). 사회조사와 한국사회학. (미간행).

현장에서 데이터로: 한국 사회과학의 선구자들

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를 지낸 이해영·이만갑은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1955-56년 미국에서 유학한 이후 한국에 본격적으로 사회조사 방법을 도입하고 ‘사회조사의 시대(1958-1963)’를 이끈 선구자로 통합니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학술적인 연구를 위한 체계적이고 조직화된 사회조사가 부재한 학계 상황에서, 두 교수는 미국의 사회조사방법을 들여와 한국 학계에서의 제도화를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한국 사회학계 ‘최초’의 전국 단위 체계적 조사로 평가받는 1959년 「한국 농촌가족 조사」에 공동으로 참여하였으며, 1960-70년대 가족계획 연구를 수행하였습니다. 

엄밀한 방법론에 입각한 ‘사실의 수집(data collection)’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자 했던 이들은 데이터를 대하는 태도로 인해 자료의 공유와 재이용의 필요성을 공통적으로 강조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론으로 두 교수는 조사일지 등을 기록하여 조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조사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릴 수 있도록 하여 동료와 후속세대 연구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KOSSDA에 아카이브되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회학계의 기획자, 이해영 교수 (1925-1978)

이해영 교수의 주제적 관심은 인구학이었습니다. 이해영 교수는 전문적 조사연구 실행 기관이자 연구기관으로 1965년 서울대 인구연구소(현 사회발전연구소)를 설립하고 인구학 및 사회조사 연구와 함께 후학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교수의 대표적인 인구학 분야 사회조사 연구로는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1965년과 1974년 두 차례 수행된 「한국 중간도시에서의 차별출산률」 연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조사는 미국 인구협회의 재원으로 인구및발전연구소(현 사회발전연구소)의 교수와 제자 25명에 의해 수행된 대학 내 체계적인 사회조사기관을 기반으로 한 공동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수는 사회조사에 요구되는 재정, 연구인력의 조직과 관리, 다학제적 연구, 자료와 연구성과의 공유와 확산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이해영 교수는 ‘기획자’로서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김인수, 2016).

한국 농촌연구의 개척자, 이만갑 교수 (1921-2010)

이만갑 교수는 미국 코넬대에서의 연구를 기반으로 미국 사회조사방법을 국내에 도입하고 농촌사회학 연구를 주도한 학자입니다. 교수는 “기존 사회학은 원론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검증의 방법과 절차가 결여되어 있어 한국사회가 착실하게 발전하려면 정책이나 계획을 직관에만 의존하지 말고 가급적 실증주의 지식에 입각해 수립해야 한다(이만갑, 2004)”고 믿고 사회과학계 사회조사방법의 도입과 정착에 힘썼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이만갑 교수는 국내 최초로 사회조사방법론 강의를 개설하였으며, 『사회조사방법론(1960)』을 출간하였습니다. 교수의 또 다른 업적인 농촌 사회조사는 이 전시에서 소개하는 1958년 1969년 1980년 3차년도에 걸친 경기도 광주군 및 용인군 소재 6개 마을의 종단적 연구(longitudinal study)인 『한국 농촌의 사회구조』를 대표로 들 수 있습니다.

출처: 김인수. (2016). 「농석 이해영의 사회학: ‘한국사회조사사’의 측면에서」. 『한국사회학』 50(4). 

이만갑. (2004). 삶의 뒤안길에서. 세계일보. 이해영·이만갑 이미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웹사이트.


우리는 왜 현장에 있었는가: 초기 한국 사회조사의 시대

잃어버린 ‘낭만적 시대’를 되돌아보며

“이 시대는 사회조사와 사회통계가 한 연구자 안에서 통합되어 있었던 ‘낭만적 시대’에 비견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사회학계가 마주하고 있는 현장(field)의 상실/종언이라는 사태와 대조된다. 사회조사의 수행자와 그 결과물로서의 통계의 활용자가 서로 분리(/분업)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최근에는 빅데이터 등 새로운 사회지표화의 방식이 고안되어 활발히 활용되면서 사회학은 물론 사회과학 전반에서 경험적 사회조사가 차지하는 지위는 더욱 강등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시기 사회조사 작업이 가졌던 의미를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김인수, 2016)”.

새로운 방법론의 여명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국에 소개된 미국사회학은 당시 미국에서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던 경험적 조사방법과 동일한 의미로 인식되었고, 한국의 신진 사회학자 그룹에 의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습니다. 사회조사는 한국에서 농촌연구, 가족과 인구문제, 계층문제 분석에 필요한 방법론으로 비중 있게 활용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한국사회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을 세우기 위해 데이터 수집이 일차적이면서도 대단히 긴급한 과제로 간주되었던 저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Koh, 연도미상).

현장과 이론 사이의 긴장

이러한 배경에서 도입된 사회조사는 1960년대 체계적인 조사방법으로 발전하였으며, 과학적인 분과로서나 제도로서 한국 사회학이 자리매김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조사방법이 사회학의 제도 안으로 수월하게 통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증주의에 입각한 자료 수집에 대한 강조는 철학과 이론의 부재라는 비판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만갑 교수는 「사회조사방법에 대한 그릇된 견해」의 논문에서 “사회조사방법이 단지 사실의 수집과 나열, 의미 없는 통계적 조작에 그치는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회조사방법은 절대로 거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학을 포함한 행동과학이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과학적 접근하는 방법과 기술의 전체(全体)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발자국들

이 전시는 사회조사가 자리매김하는데 노력했던 당시 신진 사회학자와 그 제자그룹의 유산으로, 초기 사회학계 사회조사의 클래식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연구자들은 과학적 조사를 위한 조사계획의 수립에서부터 조사표(질문지) 작성, 문헌조사, 예비조사(파일럿 조사), 본조사, 보완조사, 자료분석(빈도표 등) 등 일련의 연구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고 이것이 데이터로서 활용되기를 바랬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기록들을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현장의 생생함과 통계의 정확성이 하나로 어우러졌던 그 시절의 연구 전통이 현대 사회과학에 던지는 메시지를 듣고자 함입니다.

출처: Koh, Youngbok. Sociology in Korea. (연도미상) 

김인수. (2016). 「농석 이해영의 사회학: ‘한국사회조사사’의 측면에서」. 『한국사회학』 50(4) 

이만갑. (1958). 「사회조사방법에 대한 그릇된 견해」. 『사회학보』 제1집.